☞풍경 속으로...

장릉(단종의능)

라라루씰 2015. 8. 17. 19:42

 

 

장릉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4~40킬로미터에 조영되었다. 장릉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로 면적은 약 353만 7,000제곱미터나 된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10세 때인 1450년 아버지인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이 된다.

장릉은 세자 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고, 석물도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진 후릉을 따랐다.

객관적 조건으로만 보면 왕위 계승자로서 단종의 조건은 완벽했다. 문종도 적장자였고, 단종도 적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가장 비참한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문제는 단종이 너무 어린 나이로 왕이 된 데다 수양대군(36세)과 안평대군(35세)을 중심으로 한 숙부들이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들은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야심을 갖고 있었다. 단종의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 대의 인재들이었다. 삼정승은 세종의 고명각주[1] 을 받은 황보인, 남지, 김종서였고, 그 아래의 실무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 대부분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즉위한 지 1년 반 만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그러다 단종의 최후가 찾아온 이유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 세조의 동생)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면서 사건이 종결되는 듯했으나 세조의 신하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단종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면 차후에도 사육신, 금성대군과 같은 복위 사건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단종이 있는 영월 청령포로 갔다.

하지만 왕방연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고 교생각주[2] 복득이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은 목을 매 자진(自盡)했다고 되어 있다. 사후 처리도 비참해 야사에 따르면 시신이 청령포 물속에 떠 있는 것을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했던 영월호장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릉 자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가 장사 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렵다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단종의 시신을 홀로 밤에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엄홍도의 충절은 높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자리는 물론 추후에 공조참판이라는 벼슬도 내려졌다. 이런 예를 근거로 영월 사람들은 영월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데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또한 장릉은 향토 문화재가 거행되는 유일한 왕릉이다.

 

 

 

 

 

 

 

 

 

 

 

 

 

 

 

 

 

 

 

 

 

 

 

 

 

 

 

 

 

 

 

 

 

 

 

 

 

 

 

 

 

 

 

 

 

 

 

 

 

 

 

2015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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